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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때 대한민국에서 젊은 직장인들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를 소지하면 부의 상징일 때가 있었다. 미국 1803년 이후 미국 대륙은 큰 땅으로 인해 우편물이나 소포 같은 짐을 운반해야 하는데 느린 운송보다는 급행 편이라는 익스프레스(Express)로 회사를 뉴욕의 최고의 중심가인 월스트리트에 핸든스 익스프레스라는 사무실을 연 월리엄 핸든은 철도를 이용하여 화불 운반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핸든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 철도회사에게 운송업무를 독점으로 할 수 있게 지불금을 더 주고 장기 임대 독점 계약을 맺습니다. 핸든스 익스프레스는 운영이 안정화될 무렵 핸든은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바다, 강을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미국 5대 호수중 하나인 이리호부터 허드슨강 상류를 이어주는 이리운하까지 화물 운송하는 선박 운송업을 하던 헨리 웰스를 만나게 되고 그와 합자해 우편 운송사업은 잘 운영되었지만 1년 뒤 서로의 의견 차이로 둘은 갈라서게 되는데 월리엄 핸든은 미국 동부를 잇는 올버니에서 버펄로까지 사업을 확장 건을 반대했고 헨리 웰스는 꼭 필요한 확장이라 보았습니다. 헨리 웰스는 확장 건을 혼자서라도 해결하기 위해 투자자를 영입하는데 크로포드 리빙스턴과 조지 포메로이가 투자를 해줍니다. 투자를 받은 핸리 웰스는 리빙스턴 앤 컴퍼니를 설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올버니에서 버펄로까지 강도 없고 자동차도 발명되기 전이라 빠른 운송수단을 찾던 중 역마차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후 헨리 웰스는 본인이 직접 역마차를 몰아 화물을 운송하게 됩니다. 1843년 헨리 웰스에게 기막힌 뉴스가 전해집니다. 올버니와 버펄로 사이에 철도가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회사가 너무 커진 헨리 웰스는 올버니와 버펄로 사이에 화물운송사업을 맡아줄 인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운송회사 화물 대리점을 운영했던 젊은 월리엄 조지 파고를 영입하게 됩니다. 이 젊은이가 훗날 헨리 웰스와 함께 미국 4대 은행 중 하나인 웰스 파고 앤 컴퍼니를 설립한 인물입니다. 1845년 1월 14일 핸든스 익스프레스 사장인 월리엄 핸든이 사망하고 핸든이 운영했던 올버니와 뉴욕 간의 운송사업을 인수하게 됩니다. 1848년 헨리 웰스의 투자자였던 크로포드 리빙스턴이 사망하자 이때 웰스는 뉴욕 서부 급행 화물운송사업권을 사망한 리빙스턴의 동생과 월리엄 조지 파고에게 팔아 버립니다. 제임스 윌리엄 마샬이란 인물이 캘리포니아주에 한 강에서 금광을 발견해 많은 사람들이 황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오게 되는데 이 시기를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라 하고 큰 폭의 금 생산량 증가로 미 서부 개척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에 따라 운송업 수요도 큰 폭으로 상승하고 헨리 웰스의 화물 운송사업도 커지게 됩니다.
화물 급행 운송회사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탄생
역마차의 마부였던 존 워렌 버터필드는 뉴욕 중서부에 역마차 사업을 장악해 가고 있었는데 1849년에는 버터필드 왓슨 앤 컴퍼니를 설립한 존 워렌 버터필드는 돈 되는 급행 화물 운송사업에 뛰어들게 되고 순식간에 헨리 웰스 앤 컴퍼니와 라이벌 관계가 돼버립니다. 처음엔 운송료를 서로 낮추어 경쟁하다 소득이 거의 없어지게 되자 두 회사는 합병하게 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리빙스턴 파고 앤 컴퍼니의 월리엄 조지 파고도 합병하기를 희망하면서 이 3개의 회사는 각각 5만 달러 투자금을 출자하여 합병합니다. 1850년 3월 18일에 드디어 미국 전역에 급행 화물운송을 실현하겠다는 의미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가 창립되었습니다. 단 지불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약속으로 회사를 운영하게 됩니다. 성장해 가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1855년 9월 아이오와 주 정부로부터 5만 달러가 들러 있는 두상자를 뉴욕에 있는 미 재무부에 전달을 해달라는 운송 임무를 맡게 됩니다. 하지만 미 재무부까지 화물운송 후 두 개의 상자를 열어 보니 총알과 납판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후 범인은 잡혔지만 5만 달러는 이미 사라진 후였고 신뢰가 생명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5만 달러와 이자까지 미 재무부에 전달하게 되고 이로써 신뢰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동남부에 아담스 익스프레스를 제외한 미국 전역을 독점 화물 운송하게 되고 이는 미국민에게 안 좋은 시선을 심어주게 되어 1885년에 여러 다른 자회사를 설립해 모든 수익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1861년 미국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운송사업은 병사들의 편지, 훈장 탄피까지 목숨을 건 배달을 하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더 많은 수익을 내게 됩니다.
금융업계 진출
1862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1500명의 사원과 890개의 사무실과 대리점을 운영하며 미국 전역에서 화물 급행 운송사업을 하며 미국 우체국보다 많은 지점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체국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대항해 1864년 우편환 어음 시스템을 개발해 미국 전역에 머니 오더로 송금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매출 감소에 빠트리게 됩니다. 1882년 긴 매출 감소를 겪고 마르셀러스 베리라는 직원의 제안으로 머니 오더 사업을 시작하는데 우체국의 머니 오더는 숫자를 쓰니 위조가 가능했고 아베리 칸 익스프레스의 머니 오더는 종이 앞에 붙어 있는 숫자를 가위로 잘라내 버리기 때문에 위조할 수 없는 특징으로 대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매출도 오르게 됩니다. 1890년대 말에 와서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머니 오더 연간 매출이 350만 달러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송금자가 가지고 온 돈을 수취인이 받을 때까지 보류하는 기간에 송금자의 돈을 융통할 수 있는 유보 자산이 되는데 이 유보 자산으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막대한 수익을 거두게 됩니다.
유럽 이민자의 송금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머니 오더는 유럽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번 돈을 고향 유럽에 송금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걸 안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유럽 여러 나라의 있는 50여 개의 은행과 계약과 을 맺고 예탁금을 주어 현금화를 가능케 하여 머니 오더를 현금화할 수 있게 시스템을 만듭니다. 이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 계약하기를 원하는 유럽 은행은 늘어났고 이로써 글로벌 금융회사로 거듭나게 됩니다. 1891년 당시 월리엄 조지 파고의 동생, 제임스 콩텔 파고였는데 신상에 불편함을 증오하는 인물로 유럽여행 중 돈을 바꿀 수 있게 만든 신용장의 복잡한 절차로 있는 데로 화가 나서 미국으로 귀국한 후 여행자의 싸인이 들러간 여행자수표를 만들어 회외 은행에서 현금으로 교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나라마다 틀린 환율까지 여행자 수표에 기재해 해외에서 올바른 환율로 현금을 교환할 수 있게 개선했으면 마침내 1891년 3월 드디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여행자 수표가 만들어집니다. 또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여행업계에도 진출하게 되는데 당시 미국인들은 프랑스 파리를 가고 싶은 도시로 생각했고 프랑스인들은 영어를 할 수 있어도 프랑스어가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해 영어를 사용하지 않아 많은 미국 여행객들이 프랑스에서 언어 불소통으로 힘들어했는데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파리에 지사를 내서 관광안내, 호텔 예약 등 미국 여행자들을 위한 무료 상담서비스로 열어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자사의 여행자 수표의 수요도 늘어나게 됩니다. 1902년부터는 미국으로 향하는 배편과 철도편을 팔기 시작했고 미국 명소 관광투어 사업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1917년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참 점하게 되고 군인 전쟁물자 철도운송 문제로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은 전미 철도를 국유화하고 모든 급행선 운송회사를 통합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로 인해 1918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철도 급행 운송사업을 종료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은 계속해서 혼란의 시기를 갖고 있었고 신비한 중국에 눈을 돌리고 무역업까지 눈을 돌린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중국에서 물건을 들여와 미국에서 팔면 수이을 볼 거라 생각하고 마작패와 5만 개의 유리구슬, 화병까지 들여오는데 때마침 미국에 경제 대공황이 닥치면서 1921녀 가을 외국 무역본부를 폐지했습니다. 기나긴 정체의 그림자가 다시 드리우고 1923년에 프레드릭 스몰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장이 되면서 여행자수표사업과 머니 오더 사업만으로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었고 1929년 10월 24일 세계 대공항이 시작으로 모든 미국 산업은 침체기에 빠집니다. 하지만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여행자 수표와 머니 오더의 현금화 서비스 사업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심지어 1933년 3월 루주 벨트 미 대통령이 은행 휴업 조치를 시작했고 미 전역 은행들의 영업이 중단된 상황에서도 아메리칸 익스 프레스는 끝까지 서비스를 단행했습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에서도 서비스가 계속되면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신뢰도는 미국 내에서 최고로 평가받습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유럽 재건사업 인 마샬플랜으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미국민들에게 유럽여행을 하면 유럽을 돕는 길이라고 이것이 마샬 플랜 다라고 광고하며 항공사의 큰 항공기 도입으로 유럽으로 여행하는 미국 여행객들의 수요는 폭발적이었습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신용카드(아멕스)의 등장
그러던 중 1950년 프랭크 맥나마라라는 뉴욕의 사업가는 시당에서 식사를 하고 결제를 하려고 지갑을 여니 현금이 없었고 그때 그는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식사 요금을 나중에 지불하면 안 될까 하고 말이죠. 프랭크 맥라마라의 변호사 친구인 랄프 슈나이더는 다이너스 클럽 카드(Dinners club card)를 만들게 되고 이 카드는 여러 다른 음식점과 계약한 후 카드 고객이 식사를 한 뒤 월말에 결제하는 시스템으로 일종의 신용카드인 셈입니다. 1950년 드디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신용카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주 사업인 여행자수표사업과 겹치지만 시대를 따라가는 선택이었음을 알고 있기에 계속 진행하는 도중 전미호텔협회에서 회원수 15만 명 , 가맹호텔 5천 개를 받는 제안을 받게 됩니다. 1958년 10월 1일 드디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는 다이너스 클럽 카드보다 1달러보다 비싼 회원비 6달러에 판매하게 됩니다. 1951년부터 최정예 로마 군사 센추리온이 왼쪽 상단에 박혀있는 자주색 종이카드였는데 센추리온은 100명을 힘과 권력을 가진 지휘관이었습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신뢰를 바탕으로 회원 모집한 결과 신입회원이 25만 명이나 가입을 했고 1959년 5월에는 비로써 플라스틱 카드로 전환하고 카드번호, 이름, 주소 등을 엠보싱 처리하여 내구성 향상에 힘썼습니다. 1961년 3월 IBM 컴퓨터의 등장으로 회원정보 자동화가 진행되었고 1968년 비로소 자주색에서 녹색디자인 플라스틱 카드로 변경되었습니다. 1971년에는 IBM이 발명한 마그네틱 스트라이프 기술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신용카드에 적용하여 데이터 처리속도를 향상합니다. 현재에는 스마폰으로 접목시켜 디지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로 진화하게 되었습니다.
결론
현재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주가는 146.15달러(2022년 6월 24일 기준)며 52주 최고가는 194.88달러 52주 최저가는 73.60달러(2020년 4월 3일 기준)으로 두배정도 올랐군요. 이대로 라면 미국의 여행인구 증가는 계속 가속화될 거고 200달러까지는 무난히 오르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지금의 미국물가 지수가 8.6% 41년만에 최악이고 기준금리도 고공행진이 계속 될전망이지만 END코로나로 미국내 여행인구 증가는 장기화로 게속해서 증가하지 않을까 합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주식이고 여행에 꼭 필요한 신용카드고 대부분의 철밥통 미군들이 아멕스카드를 사용합니다. 그러니 작게 매수해서 들고가는 것도 무난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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