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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C
meriweder
2022. 7. 8.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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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의 아이콘 할랜드 센더스의 탄생
저희가 잘 알고 있는 KFC 창업자자 닭튀김으로 미국 역사를 쓴 프랜차이즈의 산 증인입니다. 1890년 9월 9일 미국 인디에나주 헨리빌에서 동쪽으로 5km 떨어 촌구석에서 농부의 심부름을 해주면서 사는 월버 데이비(Wilbur David)와 그의 아내 마가렛 앤 센더스(Margaret Ann Sanders) 사이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나는데 이 아이의 이름은 할랜드 데이비드 샌더스(Harland David Sanders), 이 아이가 커서 KFC창립자가 됩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할랜드가 5살 때 두 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돌아온 후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그날 저녁 아버지께서 돌라가십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는 할랜드와 두동생을 키우기 위해 토마토 공장에 들어가 토마토 통조림을 만드는 일을 시작합니다. 1897년 할랜드가 7살이 되던 해 큰형으로써 동생들의 식사와 돌보기 위해 호밀빵을 만들어 동생들과 어머니의 공장 지인들까지 맛있게 먹을 만큼 음식 솜씨가 좋았습니다. 할랜드가 12살 되던 해에는 어머니께서 재혼하시면서 하지만 할랜드의 계부는 성격이 고약하고 성질 급한 사람이었고 자주 할랜드와 동생들에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후에 계부는 할랜드와 동생들을 126km 떨어진 어느 농장에 일하도록 보내버리게 되고 농장 일을 하면서 주위에 사는 이모집에 얹혀살게 됩니다. 할랜드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일이 많아 교과 과정을 따라가기 힘들어졌고 결국 7학년에 학교를 자퇴하게 됩니다. 그런 후에는 집을 나오게 되고 홀로서기를 하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하게 됩니다. 막상 집을 나와서는 여러 잡다한 일을 하게 되는데 14세 때는 인디애나 남부 쪽 농장에서 일을 했고 16세가 되자 철도 쪽에 계신 삼촌의 도움을 받아 전차 차장 일을 했으며 일하던 중 군입대 지원자 모집하는 장병들을 만나게 되고 나이가 어려 입대할 수 없었지만 나이를 솎여 육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나이가 어리다는 게 발각되어 육군에서 강제 퇴역당하고 삼촌댁으로 오지만 기관차 엔진에 붙어있는 석탄재를 긁어내는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7세가 되어서 석탄재 때는 파이어맨이 되었습니다.
결혼과 불행 또 시작
1908년 할랜드는 조세핀 킹(Josephine King)이란 여인과 결혼하게 되고 1남 2녀를 낳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하게 되지만 어느 날 할랜드는 직장동료와 심한 다툼으로 직장에서 해고당하게 되면서 할랜드는 방황이 시작됩니다. 하는 일마다 힘들어지고 그만두게 되고 가장으로써 할랜드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아내와 아이들은 아버지, 어머니댁에 보내고 일을 찾기 시작합니다. 1920년 드디어 할랜드는 투자자들을 모아서 오하이오강에서 패리호를 운항하는 회사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게 됩니다. 그런 후 할랜드가 소유한 주식을 모두 팔아 2만 2천 달러(현 시세로 4억 원)라는 큰돈을 쥐게 됩니다. 이 돈으로 당시 유행하는 아스틸렌 램프사업에 투자하지만 얼마 뒤 델코 일렉트릭(Delco Electronics)에서 전기램프의 등장으로 또다시 빈털터리가 됩니다. 1920년대 후반에는 켄터키주 캠프 넬슨에 살면서 미쉐린 타이어의 세일즈맨을 하게 되는데 직장에서 맥스웰이라는 고급 자동차까지 지원해주는 복지가 좋은 회사였는데 어느 날 교량을 차로 달리다 교량이 무너 지면서 차와 함께 교량 밑 바닷속으로 빠지게 되지만 간신히 목숨만 구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차와 함께 직장도 잃게 됩니다. 그렇게 40세가 될 때까지 모아둔 돈도 없는 인생이 실패 그 자체였습니다.
닭튀김(치킨)의 시작
1930년 어느 날 지인들의 도움으로 캔터키주 코빙이라는 곳에서 쉘오일 주유소를 입대하여 경영하게 됩니다. 다행히 주유소는 잘 되었고 요리하기를 좋아했던 할랜드는 주유소 옆 창고를 개조해 작은 카페형 식당을 만드는데 이름은 센더스의 서비스테이션 앤 카페(Sanders' servicestation And Cafe)로 스테이크, 햄, 그레이비를 엊은 감자, 옥수수로 만든 그리츠에 비스킷까지 팔았고 기름에 튀긴 치킨요리까지 팔았습니다. 닭튀김 요리는 북아메리카의 그 당시 대접용 식단에 들어갔고 이 닭튀김 요리개발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이후에는 캔터키주를 지날 때 많은 여행자들이 들려서 먹고 가는 음식 맛있는 맛집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1936년 켄터키 주지사였던 루비 라푼은 켄터키주의 지역음식을 만들고 여러 지역 봉사를 해온 할랜드의 공로를 인정해 커넬(대령) 샌더스 라 칭하고 켄터키에서 수여하는 최고의 명예훈장을 수여합니다. 이후 할랜드는 주유소의 휘발유 저장탱크를 없애고 본격적으로 식당을 오픈하게 되는데 식당 이름은 센더스 카페(Sanders Court & Cafe)라 명하고 작은 모텔도 만들어 숙박사업까지 하면서 순조롭게 사업은 잘 운영되는데 1939년 11월 모텔과 식당이 화재로 타버리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140석 식당과 모텔을 다시 짖고 운영하게 되는데 닭튀김 요리를 계속하는데 조리시간이 긴 닭튀김 요리를 개선하고자 닭 튀기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본인만의 닭튀김 압력솥을 개발해 1940년에 이르러 닭튀김 압력솥을 벌타(Berta)라 명하고 1940년 7월에 8분 만에 완성되는 11가지 향신료와 함께 먹음직스러운 갈색 닭튀김 요리를 만들 수 있었고 또한 닭을 튀긴 후 남겨진 튀김가루를 이용한 크렉클링 그레비(Clicklin' Gravy)소스도 개발하게 됩니다. 샌더스 식당과 모텔사업은 다시 순조롭게 운영되고 개발한 닭튀김 요리까지 인기를 끌면서 많은 돈을 벌게 됩니다. 하지만 닭튀김 하나의 맛으로는 만족 못한 할랜드는 우여한 계기로 켄터키주의 캔벌랜드 호수 여행객들에게 500인분 닭튀김 주문이 들러오는 이 여행객들에게 새로운 닭튀김 소스를 선 보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면서 KFC의 전설이 됩니다. 이것이 저희가 잘 알고 있는 할랜드 센더스의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이 됩니다. 1941녀 12월 7일 52세가 된 샌더스는 일본군에 의해 진주만이 공습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이로써 할랜드 식당과 모텔을 깊은 침체기를 맞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47년 부인인 조세핀과 이혼하게 됩니다.
프랜차이즈의 시작
1949년 비서였던 클라우디아 레딩턴과 결혼하게 되고 켄터키 주지사였던 로렌스 웨더비로부터 다시 한번 커넬(대령) 샌더스로 훈장을 받게 되고 이때부터 켄터키 스타일의 끈 넥타이와 검은색 버크 양복을 입고 지금 저희 가 알고 있는 KFC 매장 입구에 서있는 뿔테 검정 안경 하얀 버크 양복 스타일 할아버지가 트레이드 마크가 됩니다. 그리고 프랜차이즈 주유소를 경영해 오던 할랜드는 본인의 치킨사업을 프랜차이즈로 전환해 노후를 대비해 안정적인 수익을 받기를 원했는데 그때부터 그는 그의 자동차 트렁크와 뒷좌석에 그의 발명품인 닭튀김 압력솥과 11가지 향신료, 닭을 싣고 홍보를 위해 여러 주를 떠돌게 됩니다. 여기서 할랜드 센더스의 실패의 아이콘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 수 있습니다. 할랜드와 아내 클라우디아와 함께 켄터키주 여러 도시의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닭 튀기는 법을 압력솥 벌타에 시현하고 레시피 제휴 계약을 제안했지만 790번의 제휴 거절을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다른 식당을 찾아다녔고 1951년에는 잠시 제휴 신청 여행을 멈추고 8월에 있을 주상원의원 출마하지만 낙선하게 되고 다시 여러 식당을 찾아다니지만 1952년 62살에 할랜드는 시카고대학에서 레스토랑 단기코스를 듣게 됩니다.
믿는 자의 의해 발등 찍히기
그리고 같은 반에 피트 하먼(Fete Harman)이라는 젊은이를 눈여겨보게 되는데 술 담배도 안 하는 피트 하먼을 좋게 보고 할랜드는 여러 맛집 투어와 음식과 식품사업에 대한 생각을 서로 공유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단기 코스가 끝난 후에도 교우관계를 계속 유지하는데 이때 피트 하먼이 2만 4천 달러를 들려 자신의 드라이브 인을 개조하여 레스토랑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피트 하먼의 레스토랑을 보러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를 방문하게 됩니다. 피트 하먼은 장거리 여행으로 본인을 방문한 할랜드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지만 할랜드는 본인의 닭튀김 레시피와 요리를 선 보일 테니 맛을 평가해 주길 바란다고 했고 피트 하먼은 그의 가족과 식당 직원들 불러 모아서 시식하게 했는데 거의 하나도 안 남기고 모조리 먹어 치웠습니다. 하지만 피트 하먼은 할랜드의 닭튀김을 본인 식당에 팔 생각이 없다고 말했고 힐랜드는 아내 클라우디아 함께 호주를 가게 됩니다. 돌아오는 길에 잠깐 피트 하먼의 레스토랑에 들리는데 할랜드의 닭튀김은 캔터키 프라이드치킨(Kentucky Fried Chicken)으로 2미터의 광고판까지 제작해 닭튀김을 엄청나게 팔아 치우고 있었습니다. 피트 하먼은 할랜드에게 거짓말까지 하며 할랜드의 닭튀김 레시피와 거의 흡사하게 하여 압력솥 6개로 엄청난 양의 닭튀김을 팔고 있었고 심지어 광고판 페인터로 일하는 돈 앤더슨에게 캔터키 프라이드치킨이라는 아이디어까지 얻어 2미터 광고판까지 제작되었고 할랜드는 이 광경을 보고 본인의 치킨 프랜차이즈를 무단 판매한 피트 하먼에게 실망하고 있었지만 본인의 프랜차이즈 첫 매장이니 좋은 의도로 레시피를 전수해 주고 한 마리당 5센트의 수수료를 받기로 계약했습니다. 또한 1957년에 피트 하먼은 자신의 매장에 플라스틱 양동이(버켓)를 팔러 온 판매자에게 하나를 구입해서 거기에 14조각의 켄터키 프라이드치킨과 으깬 감자와 그레이브 소스를 첨가한 패밀리 버켓이라는 3달러 50센트인 세트메뉴를 개발하는데 그 당시 미국 주부들은 주말만은 음식 식단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패밀리 세트를 3달러 50 센트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가족 모두가 즐길 수 있다는 장점으로 매출은 급상승하게 되고 이것 또한 캔터키 프라이드치킨의 트레이드 마크가 됩니다.
상표등록과 특허 신청
1955년 할랜드는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의 상표등록과 압력솥 벌타의 특허 신청을 하게 됩니다. 1956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 연방 고속도로의 길을 내는 사업으로 250억 달러의 승인안에 사인하고 여러 고속도로가 생기는데 75 고속도로의 건설로 더 이상 할랜드 샌더스의 레스토랑으로는 차가 지나가게 되지 않자 식당과 모텔을 정리하고 이젠 66세의 할랜드는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고 싶었지만 한 달에 나오는 연금 105달러와 피트 하먼으로부터 매달 받는 프랜차이즈 수수료 10달러가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할랜드는 프랜차이즈 계약을 더 따기 위해 인디애나주와 오하이오주를 돌아다니면서 이무렵 저희가 항상 KFC입구에 서 있는 하얀 양복이 트레이트 마크가 된 하얀 양복의 할랜드 샌더스를 볼 수 있습니다. 할랜드는 인디애나주 포트웨인에 위치한 더 하비 하우스에서 수석 요리사로 일하는 데이브 토마스(Dave Tomas)를 만나게 되고 프랜차이즈 계약까지 맺을 수 있게 되고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지역에 4개의 캔터키 프라이드치킨을 운영하던 필립 클라우스는 매장 운영을 잘 못해서 적자가 발생하니 데이브 토마스에게 매장을 운영해서 안정화를 찾는다면 매장의 지분 45%를 지불해 준다는 제안 해 그의 제안을 승낙하고 먼저 캔터키 프라이드치킨의 제일 잘 나가는 메뉴 위주로 가게를 운영하고 브랜드 위주의 할랜드 샌더스가 인자하게 웃고 있는 모습의 치킨 버켓을 긴 축을 세워 그 위에 대형 회전 버켓 조형물을 올려 광고하였는데 이 마케팅은 성공하면서 데이브 토마스는 필립 클라우드의 캔터키 프라이드치킨 매장 4개의 45%의 지분의 보유하게 됩니다. 이후부터는 많은 캔터키 프라이드치킨 매장에 이 회전 조형물 간판을 설치하였고 할랜드 샌더스는 프랜차이즈 노하우를 데이브 토마스에게 많이 가르쳐 줍니다. 데이브 토마스는 나중에 윈디스(Wendys')라는 햄버거 프랜차이즈를 설립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됩니다. 이후에도 할랜드 샌더스는 여러 주를 돌아다니면서 프랜차이즈 계약을 따오는데 하랜드가 돌아다닌 거리가 32만 킬로미터로 였다고 합니다. 1956년에 6개인 매장이 1960년에는 약 200개가 되었고 1963년에는 600개로 늘었고 이로써 실패의 아이콘이었던 할랜드 샌더스는 더 이상 돈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어느새 74세라는 나이가 되어 이젠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을 브리테니 컬 백과사전으로 큰돈을 번 젊은 사업가 존 브라운 주니어를 만나게 되고 2백만 달러에 매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존 브라운 주니어와 투자자, 잭 메시는 할랜드에게 계속해서 캔터키 프라이드치킨 품질과 교육을 해줄 것을 원했고 홍보해 주는 조건으로 연봉 4만 달러에 할랜드를 계속 일할수 있게 해 줍니다. 또한 존 브라운 주니어는 매장의 인테리어와 외관을 빨간색과 흰색 줄무늬의 디자인을 동일하게 하고 프랜차이즈 매장 전체의 메뉴도 통일하며 테이크아웃형 프스트 푸드 브랜드로 변모시켰고 전문적인 프랜차이즈 경영 덕분에 매장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1970년까지 48개국에 3천 개의 매장이 세워졌지만 보기와 다르게 적자를 면치 못해서 1971년 7월 스미노프 보드카로 유명한 휴블레인에 2억 8천5백만 달러에 매각되고 1980년 12월 16일 불운의 아이콘 할랜드 샌더스는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KFC의 새로운 도약
1982년 캔터키 프라이드치킨은 담배사업으로 재벌이 된 레이놀즈에게 다시 팔리게 되고 1986년에는 드디어 펩시코가 인수하게 되며 1990년 캔터키주에서 캔터키라는 단어를 상업용으로 사용할 경우 주정부에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하라는 법이 생겨났고 그 당시 비만이 사회적 큰 이슈였기 때문에 프라이드란 단어가 기름에 튀긴다는 비만의 원인으로 두각 되면서 캔터기 주정부에 라이선스 비용도 절감하고 프라이드의 부정적 의미도 없애고 앞 글자만 써서 K.F.C라 명하고 1993년 완전히 바꾸게 됩니다. 또한 시대 흐름에 맞게 징거버거를 개발해 햄버거 시장에도 뛰어들게 됩니다. 이후 펩시코는 피자헛, 타코벨, KFC로 트리콘(Tricon) 글로벌 레스토랑으로 법인을 등록하여 현재는 얌 브랜드(Yum Brands)로 변경하게 됩니다.
결론
펩시코가 인수한 이후 매출도 무난하고 누구나 찾는 햄버거, 치킨 매장으로 자리매김했으며 필자는 징거버거의 팬이면서 패밀리 버켓 메뉴를 주문해 아들 셋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얌 브랜드(Yum brands)는 현재 타코벨, 피자헛, KFC를 가지고 있는 글로벌 패스트푸드 자회사며, 주가는 117.74달러고 52주 최고가는 139.85달러(2021년 12월 31일)이며 52주 최저가는 58.08달러(2020년 3월 20일)이고 배당률은(2020년 6월 10일 기준) 1.97% 나왔습니다. END코로나로 반등에는 성공했지만 미국의 경기침체와 외식산업 소비자가 많이 늘어난 추세며 이번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안, 자이언트 스텝으로 임플레이션에 경기침체까지 오는 스테이그플레이션 올 거라는 미래 심리로 미국 소비자들은 주머니를 닫는 추세지만 코로나 이후 미국 국민들은 외부 이탈의 갈망으로 계속 외부로 이동 중이며 미국 주류 소비자층은 소비여력이 아직도 남아 있고 러-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제 재고 무기판매 매출 증가로 때아닌 완전 고용률이 소규모 감소로 이어졌고 미국 소비자 지수는 8.6% 41년 만에 최악이지만 미국 연준은 시장의 안정화를 되찾으려는 의도가 기준금리 인상을 대폭 올렸고 테슬라를 비롯 여러 빅 테크 기반 기업들이 인력감축으로 다가올 경기침체에 현금 확보하는 추세며 미국 소비자들은 2년간의 코로나 외출 금지로의 자유로 침체돼있는 외식산업을 활기를 찾고 있습니다. 얌 브랜드는 PER, ROE는 다른 블로거분들께서 쓰셔서 저에게는 식상하고 저는 그 회사의 본질과 역사 이 회사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글에 묻어내려고 노력 중입니다. 얌 차이나의 KFC는 오랜 시간 동안 중국시장을 겨냥했고 지금은 중국 내에서 1위의 외식사업을 이끌고 더불러 얌 차이나도 성장의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배당금도 존재하니 매수해 놓고 조금씩 떨어질 때마다 분할 매수하는 걸로 추천드립니다. 현금 가져가실 분들은 이번 8월에 미국 연준 발표를 보시고 행동하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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