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주식

맥도널드

meriweder 2022. 7. 12. 00:53
반응형
SMALL

1909년 뉴햄프셔주에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에 한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그의 이름은 리처드 제임스 맥도널드(Richard James Mcdonald)입니다. 훗날 형인 모리스 제임스 맥도널드와 함께  맥도널드 레스토랑을 오픈하게 됩니다. 아버지 페트릭 맥도널드는 뉴햄프셔주의 맨체스터에 있는 지피 크래프트(GP Krafts) 신발공장에서 일하다가 해고당하게 되는데 퇴직금, 연금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최악의 경제적 상황을 겪으면서 맥도널드 형제는 50살이 되기 전에 백만장자 되기를 각오하고 첫 목표로써 영화감독과 제작자가 되기를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리고 맥도널드 형제는 무성영화 세트장에 취업해 세트를 만들고 옮기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주급 25달러였지만 그들은 최대한 돈을 아껴 1930년 로스 앤잴 리스 외곽 20마일 지점에 모은 돈과 은행 대출로 750석 규모의 영화관 더 비콘(The Beacon)을 오픈하게 됩니다. 영화관에 스낵바를 만들어 스낵과 음료도 팔게 되지만 이미 1929년부터 경제 대공황으로 미국 영화 산업의 매출은 나빠져 있었고 그로 인해 이 두 형제는 대출받은 은행으로부터 영화관이 압류될 경우를 대비해 영화관 뒷마당에 은을 사서 묻어 두었습니다. 1937년 두 형제는 적자만 나는 영화관을 다른 사업가에게 매도하게 되는데 경제 대공황 시기에 유일하게 잘되는 가게가 있는데 그건 핫도그 가게입니다. 맥도널드 형제는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의 한 경마장에서 핫도그를 팔기 시작했지만 경마시즌이 끝나고 나면 더 이상 사람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맥도널드 형제는 제가 살았던 빅토빌(Victorville) 도시가 포함되는 로스앤젤리스에서 큰 산을 하나 넘어가는 90분 거리의 있는 당시 노동자들이 많이 있는 샌 버난디노 카운티(San Bernardino Country)에서 핫도그 가게를 오픈할 계획을 세웠고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에서 5천 불을 대출받아서 자동차 보급이 활발해지는 시기를 맞추어 자동차로 핫도그를 주문할 수 있는 드라이브 인(Drive-In) 매장을 오픈하게 됩니다. 핫도그 매장을 오픈 후에 메뉴를 하나씩 늘리며 매년마다 4만 달러의 큰 매출을 기록하면서 많을 돈을 벌게 됩니다. 드라이브 인 매장은 카홉이라 부르는 롤러스케이트를 탄 매장 젊은 여성 직원이 주문과 배달까지 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햄버거, 감자튀김과 코카콜라 비중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매뉴얼과 리뉴얼을 계획하고 1948년에 3개월 동안 가게 문을 닫고 베이비부머 세대 부모에게 맞는 패밀리 레스토랑을 근본에 두고 음식 주문과 배달도 트레이에  고객들이 직접 음식을 받아가는 것을 할 수 있게 해 인건비도 줄이는 한편 잘 팔릴지 않는 메뉴는 과감히 없애고 햄버거, 치즈버거와 밀크셰이크 등을 포함한 9가지 주력 상품 메뉴만 남기고 나머지 메뉴는 정리를 했습니다. 또한 30초 이내의 신속한 조합의 햄버거를 만들기 위해 동선을 앞, 뒤로 종업들이 등을 대고 서서 최소 노동으로 햄버거와 제품들을 만들 수 있게 동생인 리처드 맥도널드가 발명가적 관점에서 테니스코트에 동선을 그려 짜고 맥도널드 종업원들을 하나하나 매장 주방에서 교육시킨 후에 비로써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Speedee service system) 개발 교육시킵니다. 재오픈 후에는 30초 이내의 햄버거 재조 서비스와 15센트의 값싼 가격으로 큰 매출이 발생하고 1952년에는 아메리칸 레스토랑 매거진에서 대박 난 식당으로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동생 리처드 맥도널드는 맥도널드 광고를 위해 M자 아치를 조지 덱스터라는 건축가에게 의례 해서 황금 아치를 만들게 되고 지금의 맥도널드의 심벌이 됩니다. 1953년에는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두 번째 맥도널드 매장을 오픈하게 되고 캘리포니아 다우니에 3번째 매장이 생기며 다수의 프랜차이즈 매장으로 성장합니다. 하지만  많은 매장 수에 비해 각 각 다른 품질의 햄버거가 나오고 심지어 자체 메뉴를 개발하는 사태까지 생기며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레이 크락과의 첫 만남

1902년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태어난 레이 크락은 지금의 맥도널드 제국을 만든 실질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나이를 솎여 적 습자 구급차 운전기사로 있었으며 같이 지낸 사람이 미키마우스로 유명한 월트 디즈니와 함께 복무했습니다. 여려서부터 종이컵 팔기부터 시작해 플로리다주에서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했고 간간히 피아노 연주자로서도 일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푸드서비스 장비 제조업체(Prince Castle)에 취업해 한번에 5잔이 나오는 밀크셰이크 제조기 멀티 믹서를 팔러 다닙니다. 그러던 중 밀크셰이크 제조기인 멀티 믹서 8대를 캘리포니아 샌 버나디노에 있는 어느 식당에서 주문이 들어와 곧바로 차를 몰아 매장을 방문했는데 위생에 신경 쓰고 체계적이고 신속하기까지 하는 맥도널드 식당에 큰 영감을 받아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하고 맥도널드 형제는 레이 크락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모든 프랜차이즈 매장이 맥도널드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리처드 맥도널드의 아이디어였던 골든 아치 디자인으로 통일하게 됩니다. 1955년 일리노이주 디스플레인스에 첫 번째 정식 맥도널드 매장을 오픈하게 되고 직접 정소도 하고 메뉴관리도 하면서 프랜차이즈 사업에 대한 매뉴얼을 정비했습니다. 품질 Q(Quality), 탁월한 서비스 S(Service), 청결 C(Cleanliness) M 가치 V(Value)라는 모토로 모든 매장에서 균일한 서비스와 품질로 유지해 가도록 노력했습니다. 1958년까지 34개의 매장을 세우고 1959년만 68개 매장 오픈하면서 가파른 성장을 하지만 수익면에서는 그리 좋지 않았는데 각 매장마다 1.9% 로열티를 받고 1.9%에서 0.5%는 맥도널드 형제에게 주어야 하기 때문에 1.4%만으로는 본사 운영비로 감당할 수 없었는데 레이 크록은 새로운 방식으로 맥도널드 매장을 늘려 갔는데 우선 맥도널드 본사에서 땅을 매입하고 점주로부터 임대료를 받아 운영하는 시스템을 개발했고 이 사업으로 맥도널드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지만 맥도널드 형제와는 품질 우선 소수 매장을 원해서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져 갔는데 레이 크록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70만 달러에 모든 맥도널드 권리를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맥도널드

이 사업으로 맥도널드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지만 맥도널드 형제와는 품질 우선 소수 매장을 원해서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져 갔는데 레이 크록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70만 달러에 모든 맥도널드 권리를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두 번째 맥도널드 회장이 되는 프레드 터너와 함께 맥도널드 햄버거 대학까지 설립하면서 체계적인 프랜차이즈 교육을 해나갔고 맥도널드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1967년에 특허 신청과 함께 맥도널드 캐릭터인 빨간 코의 친근한 광대 분장을 한 로널드 맥도널드 만들었고 이는 산타클로스 다음으로 미국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현재는 무서운 영화에 광대들이 등장해 로널드 맥도널드의 캐릭터는 사라지는 추세입니다. 맥도널드의 황금 아치도 맥도널드 1호점에서 같이 일했던 프레드 터너가 맥도널드 본사의 건축가이자 엔지니어링 책임자인 짐 쉰들러와 함께 두 개의 아치를 지금의 커브 M의 황금 아치를 세우고 1968년 변형된 황금 아치는 1975년 글라스 버전, 1992년 3D 버전, 2000년 이후부터 웃고 있는 M으로 2002년에는 패스트푸드 값싼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독일의 저명한 광고회사 허에 앤 파트너스에게 브랜딩을 맡겨 이때 등장한 스로건이 I'm Lovin' it과  자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라 바빠바 캠페인에 맞춰 지금의 맥도널드 매장에 보이는 황금 아치 모양으로 조금씩 수정을 거치게 됩니다. 

레이 크록은 레스토랑 박람회에서 짐 델리게티라는 젊은 사업가를 만나게 되는데 이후 1967년에 펜실베이니아주 피치버그 공업단지 지역에 맥도널드 매장을 12개나 관리하는 가운데 다른 프랜차이즈 햄버거 매장에서는 이미 1957년에 버거 킹에서 힘을 쓰는 노동자들을 위한 큰 사이즈의 햄버거 와퍼(Whopper)를 판매하고 있었고 맥도널드도 적은 양의 햄버거가 아닌 큰 햄버거빵과 쇠고기 패티로 푸짐한 햄버거를 만들기를 원한 짐 델 리게티는 빅맥이라는 빵 3장과 쇠고기 패티 2장과 피클  양상추 치즈 양파, 소스까지 넣어 푸짐한 햄버거를 만드는데 기존의 가격보단 비싼 45센트로 책정해 판매전 본사에 허락을 기다린 후 펜실베이니아 유니언 타운점에서만 판매하는 것을 허락하고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큰 성공을 거두게 되고 1968년부터는 미국 전역에 판매하기 시작했고 1969년에는 맥도널드 총매출의 19%가 빅맥에서 나왔고 지금의 맥도널드에 상징이 되었습니다. 현재 빅맥은 전 세계에서 13억 개 이상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빅맥지수

1986년 9월 빅맥지수라는 게 등장하는데 이는 나라별 통화가치를 매기는 중요한 지표가 되는데 영국의 대표적인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지(The Economist)에서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프랜차이즈 매장을 가지고 있으며 맥도널드 운영시스템 덕분에 거의 동일란 품질의 빅맥을 전 세계에 팔리고 있었기 때문에 각 나라의 경제 지표로 비교하기에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019년 1월에 대한민국 빅맥지수는 4,500원인데 미국 달러 환율 1,118.6월로 환산하며 4.02달러입니다. 당시 미국의 빅맥 가격은 5.58달러로 이는 원화가 달러의 비해 27.9% 낮게 평가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피밀

1977년 미국 미주리주 센인트루이스에 맥도널드 마케팅 담당자였던 딕 브람스는 어린이들을 위한 햄버거와 프랜치 프라이드와 함께 장난감을 들어있는 프로모션을 기획했습니다. 이는 아이들의 관심사를 이끌러 내어 아이들이 장난감에 집중하는 동안 부모님들은 평온한 식사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1979년 해피밀은 맥도널드 고정 메뉴에 세팅한 뒤 스타트랙과 협업하여 첫 번째 공식 해피밀 세트를 출시합니다.

 

맥모닝(잉글리시 머핀 메뉴)

맥모닝은 새벽 4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만 주문이 가능한 메뉴인데 아침을 드립 커피와 간단한 식사를 먹는 대부분 미국인들을 위해 1972년에 개발된 메뉴인 백 모닝은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의 맥도널드를 운영 중인 허브 피터슨은 아침에 출근할 때 간단히 아침을 먹고 갈 수 있게 그가 아침마다 자주 먹었던 에그 베네딕트를 변형해서 부드러운 잉글리시 머핀빵 사이에 버터를 올리고 잘 구워진 동그란 계란과 캐나다산 베이컨과 치즈를 넣고 요리 맥머핀이 탄생했습니다. 이후 맥도널드 전 매장에서 아침식사로 팔리기 시작해서 1981년에는 맥도널드 총매출에 18% 정도가 맥모닝에서 나왔을 정도입니다. 

맥카페(자회사)

커피시장까지 진출한 맥도널드는 맥카페란 브랜드로 특히 아침식사 메뉴인 맥모닝에 세트로 만들어 팔면서 커피와 오렌지주스와 애플파이 같은 여러 디저트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결론

현재 맥도널드는 대한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 119개국에 37,000개 매장을 있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매장 수가 많은 프랜차이즈 기업입니다. 현재가 253.71달러(2022년 7월 12일 기준)이며 52주 최저가는 156.47(2017년 1월 9일) 52주 최고가는 271.15달러(2021년 1월 12일 기준)입니다. 맥도널드는 배당금도 주었는데 2022년 6월 20일 기준 배당액이 1.38달러 수익률(2.20%)을 주었습니다. 여러 지 표를 보니 맥도널드는 여행을 가거나 집에서 지내거나 미국인들이 항상 먹는 간식도 될 수 있고 식사도 될 수 있으며 미국인들 생활 전반에 그나마 저렴한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습니다. 지금은 달러가 1,320원(2022년 7월 12일 기준)을 가고 있어서  달러로 미국 주식을 매수하는 건 왠지 손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271달러 최고치를 깨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여행의 자유화로 지금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적어도 휴가나 나들이를 즐기는 여행인구가 대폭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맥도널드 제국은 여행인구 증가로 또 다른 도약을 하지 않을까 싶은데 경기침체로 미국인들도 지갑을 닫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맥도널드는 값싼 음식과 간식, 아이들을 위한 해피밀 아침 메뉴인 맥모닝까지 꾸준히 판매가 일어납니다. 사신분들은 게속 들고 가시고 매수하실분들은 높은 달러가격때문에 망설려 지는데 현금비중을 늘리고 8월 연준의 기준금리 발표후에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반응형
LIST